주한영국문화원 2016. 11. 23. 15:31

런던의 추잉껌 아티스트, 벤 윌슨과의 인터뷰 2편 - "재탄생된 껌을 통해 사람들을 연결시키고 싶어요."


런던은 비밀의 도시입니다. 350여 년 전 ‘런던 타워에서 까마귀들이 모두 날아가 버리면 런던 타워가 무너지고 영국에 대재앙이 닥친다’는 예언에 놀란 영국 사람들은 지금도 6마리의 까마귀를 ‘가디언스 오브 타워’로 칭하며 극진히 보살피고 있지요. 총리 관저인 다우닝가 10번지에는 쥐를 잡는 엄연한 ‘공직자 고양이(Chief Mouser to the Cabinet Office)’가 근무하고 있기도 합니다. 빅토리안 시대의 고풍스런 골목골목과 함께 현대 스트리트 아트가 공존하는 런던에는 숨어 있는 이야기들이 무궁무진합니다.


이렇듯 런던의 수많은 비밀들을 속속들이 소개할 도서가 곧 출간될 예정입니다. <런던에 미치다> 의 저자 최은숙 씨와 지니 최 씨가 함께 취재하여 쓴 비밀스런 런던 스토리 101가지를 담은 책<0부터 100까지 숫자로 풀어본 런던(가제목, 소소북스 출간 예정)>인데요, 영국문화원 블로그를 통해서 그 내용의 일부를 발췌해 연재합니다. 국내 최초로 인터뷰한 런던의 ‘추잉껌 아티스트’ 벤 윌슨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런던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을 소개할 이번 연재에 많은 관심과 사랑 바랍니다~


추잉껌 아티스트 벤 윌슨을 런던 거리에서 만나서 소개한 인터뷰 1편에 이어, 2편에서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츄잉껌 아트를 시작하고 왜하고 있는지 등에 대해 카페에서의 인터뷰에 이어 집까지 방문하면서 상세히 알 수 있었다. 한국 최초로 소개하는 추잉껌 아티스트 벤 윌슨과의 인터뷰에 많은 분들의 공감을 바란다~




쓰레기에서 아트 작품으로 재탄생된 추잉껌



좌: 런던의 머스웰 힐, 밀레니엄 브리지 등에서 11년째 추잉껌 아트를 하고 있는 벤 윌슨 © 최은숙 / 벤 윌슨이 명화를 주제로 길바닥의 추잉껌에 그린 그림. 담배꽁초와 비슷한 크기다(우측 상단). 그가 살고 있는 런던 북부의 머스웰 힐 도서관 앞에 있는 추잉껌 작품들(우측 하단) © 최은숙.

 


벤 윌슨의 아버지는 화가이다. 그의 집에는 아버지가 그린 유화 몇 점이 걸려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 지역에서 태어나 런던 북부 바넷에서 자란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예술가의 길을 걸었다. 20대에는 바넷의 숲 속에서 목재로 사람 형상을 띤 대형 조각상들을 만들었고, 핀란드 카우스티넨 민속 박물관에 설치할 대형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그 후 벤의 관심 영역은 점차 재활용 예술거리 예술로 바뀌었다. 재활용 예술 활동을 하는 동안에는 숲 속에서 쓰레기, 자동차, 각종 산업 폐기물들로 작품을 만들었고, 담배꽁초와 과자 포장지로 콜라주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거리 예술 활동으로 거리에서 상업 간판이나 디스플레이 위에 그림을 그리고 다녔다. 하지만 이 활동은 불법이어서 경찰들과 충돌이 불가피했고 다른 방법을 모색하던 벤은 길바닥에 버려진 껌을 활용한 작품 제작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벤은 35세 때인 1998년처음으로 길바닥에 붙은 껌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41세 때인 2004년부터는 전업으로 추잉껌 그림 작업에 몰두했다. 올해 52세이니, 무려 11년째 추잉껌 아트에 매달려온 것이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에는 청소부가 입는 것 같은 연두색 야광 방수복을 입고 길거리에 엎드려 작업한다.

 

“길바닥에 붙은 껌을 볼 때 우리는 역겨움을 느낍니다. 저는 이 역겨움을 아름다움으로 바꾸고 싶어요. 껌 위에 그림이 그려지고 나면 껌을 뱉은 행위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림이 아니었다면 전혀 생각지 못했던 가치 있는 행위가 되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거든요. 우리 사회는 한 사람 한 사람 행위의 총체입니다.”


그는 뱉어진 껌과 그 ‘공간’을 다시 보기를 원한다. 대량 생산물이자 인공 향이 가미된 껌은 먹을 수도 없고 씹다가 뱉어야 하는 ‘가짜’를 상징한다. 씹던 껌이 달라붙어 있는 공간은 어떤가? 그 공간은 정부나 지자체의 소유가 아니며, 사거나 팔 수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2005년과 2009년에 껌에 그림을 그리다가 경찰에 체포된 적이 있지만 몇 시간 후에 풀려났다. 쓰레기를 훼손한다고 처벌할 수 없듯, 그가 뱉어진 껌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불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인을 추모하거나 프러포즈, 반려견 등 다양한 사연을 담은 추잉껌 아트 


그는 재창조한 껌의 공간에서 나이와 성별, 인종이 다른 사람들이 연결되기를 바란다.


“런던 폭탄테러 사건 때 킹스 크로스 역에 사람들을 구하러 갔던 경찰관이 찾아와서 그때 희생된 사람을 기억하는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어요. 우리 동네 어느 소녀는 사고로 돌아가신 아빠를 추모해달라고 찾아왔고요. 런던에서 일하다 죽은 스리랑카 노동자를 추모하는 그림도 그렸습니다. 작은 껌 위에 수많은 R.I.P(Rest In Peace) 그림을 그렸지요. 제 나름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돕는 겁니다. 인터넷 시대에 우리는 연결돼 있는 것 같지만, 서로 단절되어 살고 있어요. 같은 공간에서 얼굴을 맞대고 만나야 진정한 만남이 이뤄집니다. 제가 거리에서 사람을 만나서 그림을 그리는 이유이지요.”

  


1편 마지막 부분에서 소개했던 반려견의 주인과 생선가게 사람들이 의뢰한 추잉껌 작품 / 벤 윌슨 제공 사진 재촬영



사진 위, 아래: 벤 윌슨의 추잉껌 작품 중에는 친구와의 우정과 연인의 사랑을 기념하는 맞춤형 작품들도 많다. / 벤 윌슨 제공 사진 재촬영


어느 날은 한 청년이 벤을 찾아와 여자 친구에게 프러포즈를 해야 한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 청년은 여자 친구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신발 가게 앞으로 벤을 데려가서 출입구 근처 바닥에 붙은 껌에 ‘나와 결혼해줄래?’라고 써달라고 부탁했다. 작업이 끝나고 청년은 여자 친구를 데려와 추잉껌 작품을 보여줬고 그 청년은 프러포즈에 성공했다. 


카페에서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큰 딸에게 전화가 오자 그는 환한 얼굴로 전화를 받는다. 영락없는 ‘딸 바보’ 아빠이다. 오늘은 큰 딸이 놀러 오기로 약속한 날이라고. 그에게는 스물세 살의 딸과 함께 십 대 아들 둘이 있다. 생계는 어떻게 해결할까? 그는 학교 선생님으로 일하는 파트너의 도움을 받고, 그를 후원하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기부금을 받아서 생활한다. 『BBC』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로 이름이 알려지면서, 영국 아트 축제나 국제 아트 축제 때 초청돼 가기도 하고 런던의 갤러리에서 세 차례 전시도 했다. 전시작은 추잉껌 아트를 큰 액자 사이즈로 확대해 그린 그림이나 목공예 작품이다.


카페를 나와 그의 집에 가보기로 했다. 큰 길을 따라 걷는 동안 그는 수시로 멈춰 섰다. 길바닥에 있는 그의 추잉껌 아트 작품을 닦고 수선하기 위해서다. 머스웰 힐 도서관 앞에는 여러 개의 껌 작품이 있는데, 그는 매트도 깔지 않고 바로 맨바닥에 엎드려 수선을 시작한다. 휴지로 먼지를 닦고, 떨어진 가장자리는 물감으로 다시 메우고 빛 바래 가는 표면에 래커를 뿌린다. 작품 하나하나를 바라보는 눈길과 돌보는 손길이 마치 자식을 대하는 것 같다.

 

 


머스웰 힐 도서관 앞에서 추잉 껌 작품을 수선하는 모습. 벤 윌슨은 동네 사람들의 끈이자 살아온 이야기가 담긴 작은 도서관이 그대로 남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최은숙


“머지않아 이 도서관이 옮겨 간대요. 동네 사람들의 삶이 담겨 있는 공간이 어느 날 사라지는 게 안타깝습니다. 책을 빌려보고 가족과 함께하던 삶의 스토리가 담긴 공간이잖아요. 사람들이 단절돼 있지 않고 커뮤니티의 일원임을 느끼게 해주는 이런 공간들을 지켰으면 좋겠어요.”


그는 보수 작업을 하며 그림마다 담겨 있는 사연을 들려준다. 시리아 내전이 일어났을 때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그린 작품, 할머니를 좋아하는 손녀가 부탁해서 그려준 초상화, 사랑하는 고양이를 그린 그림도 있다. 그의 집까지 300미터쯤 걸어가는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작품이 보인다. 짧게는 10분에 완성했고, 서너 시간 걸린 것도 있다. 예를 들어 템스 강변의 테이트 모던 앞에 있는 작품은 사흘 걸려 그렸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다른 길바닥에 그린 작품들도 훼손된 부분이 보일 때마다 수선을 하지만,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공들여 그린 작품이 사라지면 아쉽지 않을까? 벤은 눈에 띄는 대로 작품을 수선하지만, 작품이 결국 사라지는 데 대해서 서운하거나 아쉬운 마음은 없다고 말한다. 작품이 사라지는 것도 하나의 과정이며 창작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물보다는 창작의 과정이라는 것이 그의 예술 철학이다.



밀레니엄 브리지와 세인트 폴 대성당을 그린 추잉 껌 작품을 벽돌에 옮겼다. 벤 윌슨의 추잉껌 작품 중에는 이처럼 섬세한 그림도 많다. 벤 윌슨 제공 사진 재촬영. 



'추잉껌 아티스트', ‘환경 아티스트’ 보다는 그냥 '인간'으로 불리고 싶다는 벤 윌슨


벤 윌슨은 집으로 들어서며 복도에 걸려 있는 아버지의 그림을 보여준다. 그림 옆에는 그의 방수 작업복이 걸려 있다. 작업실로 들어가니 그의 다른 작품들이 보인다. 천 캔버스에 추잉껌 작품을 크게 확대해서 그린 유화는 갤러리에 전시했던 것이다. 길에서 주워온 담배꽁초에 그린 초미니 그림도 있다. 여기저기 쌓여 있는 붉은 벽돌에도 상형 문자와 같은 흑백 추상화가 그려져 있다.


요즘 그가 공을 들이고 있는 작품은 가로 세로 약 5cm의 까만 석판 위에 흑백의 명암만으로 그리는 그림이다. 자신의 내면을 담는 그림으로 이미 수백 장을 그렸는데, 아직 외부에 전시할 의향은 없다고 말한다. 



벤 윌슨의 집 뒤뜰에는 그가 조각한 여신상이 서 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숲 속에서 목재  조각가로 활동해왔다. Ⓒ최은숙



작업실을 지나 뒤뜰로 나가니 그가 오래전부터 해온 목재 조각 작품들이 서 있다. 뜰의 한가운데 어른 키의 두 배가 넘는 여자 형상의 조각이 서 있는데, 작가 자신의 ‘수호 여신’이라고 부른다. 여신상 외에도 크고 작은 사람 군상들이 보인다. 녹음이 우거진 큰 나무의 중간에는 트리 하우스와 작은 통나무집이 있다. 숲에 버려진 나무들을 주워 와서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준 집이다. 방 하나는 큰딸이 놀러 오면 묵으라고 꾸며놓았다. 그에게 이 뜰은 작업장이자,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낙원이다.


그는 추잉껌 아티스트로 많이 불리지만, 주변 환경을 활용하는 ‘환경 아티스트’, 기존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아웃사이더 아티스트’로도 불린다. 그와 긴 시간 대화를 나누다 보니 스스로 어떤 아티스트로 불리고 싶은지 궁금해졌다. 그는 짧게 답한다. 그냥 ‘인간’으로 불리고 싶다고. 그는 인터뷰를 마친 그 다음 주에 벨기에 브뤼셀에 초청을 받아 일주일 동안 추잉껌 아트를 하러 간다고 했다. 


 



사진 위, 아래: 벤 윌슨의 개인 작업실과 석판 작품들. 그는 오랫동안 이 작은 석판 속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새겨왔다. Ⓒ최은숙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일상이 느슨해질 때면 그와 나눴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당시 그와 인터뷰하면서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의 책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언급하며 “당신이 하는 일이 바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슈마허 철학의 실천”이라고 말하자, 그는 그 책에 대해 라디오에서 들었다면서 “지금 필요한 것은 사람을 중시하는 작은 행동”이라고 답했다. 


런던으로 여행을 가서 길을 걷다가 길바닥에서 언뜻 알록달록한 뭔가가 눈에 띄면, 지나쳐버리지 말고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볼 것. 거기엔 동전만한 크기의 멋진 작품이 그려져 있을 테니까. 벤의 작품은 머스웰 힐에 가장 많고 밀레니엄 브리지, 세인트 폴 대성당 앞, 테이트 모던 미술관 앞 길바닥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벤 윌슨의 추잉 껌 작품을 많이 볼 수 있는 곳]


머스웰 힐(Muswell Hill) 

  • 위치 : Muswell Hill Broadway, Queens Avenue 일대 
  • 교통 : Highgate 지하철역 앞 버스 정류장 G에서 버스 43 또는 134 타고 6정류장


밀레니엄 브리지(Millenium Bridge) 위

  • 위치 : Thames Embankment, London 
  • 교통 : St. Paul 역 / Blackfriars 역 


작가 최은숙

최은숙 작가는 <런던에 미치다>의 저자이자, 영국문화원 블로그에 '영국의 아이콘' 및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전시 뉴스를 연재해왔다. 저서로 가디언지의 인터넷 커뮤니티 전략을 국내 최초로 심층 취재한 <세계 1등 인터넷신문의 블로그와 커뮤니티 전략>(커뮤니케이션북스), <하루의 발견>, <여행을 쓰다>(조선앤북) 등이 있으며, 청주대, 단국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작가 지니 최

공저자 지니 최는 LG 디스플레이에서 일했으며, 한겨레 번역전문가 과정을 수료하고 청소년 문학작품을 창작하고 번역하는 작업을 해왔다. 영국 문학에 폭넓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특히 21세기 초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 조셉 콘라드 등의 작품을 번역하고픈 꿈을 갖고 있다.

내년 초에는 두 사람이 공저로 비밀스런 런던 스토리 101가지를 담은 책, <0부터 100까지 숫자로 풀어본 런던(가제목, 소소북스)>을 출간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