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와의 가상 인터뷰를 통해 살펴보는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렘브란트: 후기 작업들’ 전시회!
※ [내셔널 갤러리] 연재는 내셔널 갤러리 프레스 오피스의 정식 협조로 진행합니다. 자료 및 사진 게재 저작권은 영국문화원 블로그 사용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 전시명: Rembrandt: The Late Works
• 전시작품: 렘브란트 후기 작품 약 100점(유화 유화 40점, 드로잉 20점, 판화 20점)
• 위치: 런던 내셔널 갤러리 Sainsbury Wing
• 전시기간: 2014년 10월 15일 ~ 015년 1월 18일
• 관람시간: 매일 10:00 ~ 18:00 (금요일은 21:00까지)
• 입장료: 성인 £18 / 60세 이상 £16 / 학생 £9 / 12세 이하 무료, 예약 바로 가기
※ 런던 전시 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레이크스 국립박물관(Rijksmuseum) 전시: 2015년 2월 12일~ 2015년 5월 17일
‘렘브란트의 전성기는 금세 지나갔다. 삶의 후반부는 즐거웠던 시절이 모두 사라지고 난 다음에 부르는 쓸쓸한 후렴구였다.주 1 미술사가 토마스 다비트가 묘사한대로, 네덜란드의 황금기(Dutch Golden Age)에 화려한 20대와 30대 초반을 보낸 렘브란트 반 레인(1606~1669)은 이후 줄곧 내리막길을 걸었습니다. 세 아이와 아내를 잃었고, 집과 자신의 모든 그림들마저 경매에 넘어가고, 아들의 보모이자 정부에게 고소를 당했으며, ‘유행에 뒤진다’ ‘한 물 갔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말년에는 자신의 버팀목이던 여인과 아들마저 잃었습니다.
하지만, 작품 활동으로 보면 렘브란트의 인생 후반은 새로운 전환기였습니다. 당시 유행이나 예술적 관습에 따르기보다는, 인간 내면의 풍부하고 깊은 감정을 표현하는 렘브란트 특유의 스타일을 끊임없이 시도했습니다. 무려80~100점에 달하는 자화상과 수많은 초상화에서 풍기는 내면의 이미지, 눈가를 미묘하게 비추는 빛의 사용, 성화와 역사화에 담은 유머와 풍자는 당대 어느 화가도 보여주지 못한 경지였습니다. 이번 ‘렘브란트: 후기 작업들(Rembrandt: The Late Works)’ 전시의 큐레이터인 벳시 위즈먼(Betsy Wieseman)은 “렘브란트 사후 350년 가까이 지났지만, 경이로움은 여전하다. 그의 시도한 새로운 회화 기법, 인간 감정을 꿰뚫는 심오한 통찰은 오늘날에도 신선하고 의미가 있다”고 평했습니다.
이번 전시에는 세계 여러 나라 갤러리들에서 대여해온 유화 40점, 드로잉 20점, 판화 20점 등 약 100점이 소개됩니다. 특히, 렘브란트의 후기(1650년대부터 1669년) 작품들을 한 자리에 모은 최초의 전시로 의미가 있습니다. 이번 전시를 위해서 영국박물관, 리버풀 갤러리, 글라스고 뮤지엄 등 영국 내 소장 작품은 물론, 암스테르담 레이크스 국립박물관, 미국 로스엔젤레스 해머 뮤지엄, 호주 멜버른 빅토리아 내셔널 갤러리,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로테르담 보이만스 반 뵈닝겐 뮤지엄, 캐나다 토론토 온타리오 아트 갤러리 등에서 렘브란트의 후기 작품들이 긴 여행을 왔습니다. 덕분에 많은 후기작들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어서, 내셔널 갤러리는 이번 전시가 ‘일생에 단 한번(once in a lifetime)’의 기회라고 강조합니다.
이번 전시 소개는 렘브란트와의 가상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합니다. 드라마틱했던 삶과 작품에 대해 렘브란트가 남긴 말들과 후세 미술사가들과 평론가들의 해석을 인용하여, 인터뷰를 구성해봤습니다. 렘브란트에 대해 소개한 기사, 책과 방송을 토대로 한 것이므로, 일부 잘못된 해석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참고로 이 인터뷰 형식은 과학자 13인과의 탁월한 인터뷰 모음집 <우리는 모두 별이 남긴 먼지입니다>에서 저자 슈테판 클라인이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인터뷰한 방식을 본뜬 것입니다.
올 가을과 겨울, 런던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분들을 위한 필독 포스팅. <렘브란트: 후기 작업들> 전시 정보도 얻고 필자의 저서 <런던에 미치다>도 받아가세요!
내셔널 갤러리 <렘브란트: 후기 작업들>을 읽고, ‘나에게 자화상은 ㅇㅇㅇ이다’를 댓글로 남겨 주세요. 자화상의 의미, 내가 남기고 싶은 내 자화상의 스타일, 렘브란트 자화상 중 마음에 드는 자화상 등 다양한 댓글을 덧붙이셔도 됩니다. 댓글을 남겨주신 분 중 1분을 선정하여 최은숙 작가의 도서 <런던에 미치다>를 드립니다.
<런던에 미치다>는 기자 출신 저자가 2년여 간의 영국생활을 바탕으로 런던의 진면목을 풍부한 사진과 함께 소개합니다. 개정판이 나올 정도로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은 <런던에 미치다>는 직접 런던을 여행할 계획이 있으신 분은 물론 간접적으로라도 런던의 매력을 느끼고 싶은 분께도 꼭 필요한 도서입니다!
• 이벤트 기간: 2014년 11월 9일(월)까지
• 상품: 이벤트에 참여하신 분 중 1분께 도서 <런던에 미치다>를 보내드립니다.
* 댓글은 '공개'로 달아주시고, 그 아래에 '비공개'로 실명과 본인의 연락처(전화번호)를 꼭 남겨 주세요. 그래야 당첨되신 분들께 연락을 드릴 수 있답니다~ (연락처를 남기지 않으실 경우 이벤트 참여로 인정되지 않으며, 연락처를 '공개'로 남기셨을 경우에는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관리자가 비공개로 전환 또는 삭제할 수 있습니다. 비밀댓글로 남겨주신 개인정보는 이벤트 당첨자 확인 및 연락을 위해서만 사용되며 당첨자 선정 후 바로 삭제됩니다. 주한영국문화원의 개인정보보호처리방침은 웹사이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자신의 트위터 (영국문화원 @krBritish를 멘션), 미니홈피, 블로그, 페이스북 등에서 <런던에 미치다> 도서 증정 이벤트를 널리 알려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인터뷰어 최은숙(이하 최):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말년에 그린 4점의 자화상이에요. 죽음을 맞이하던 해에 그렸던 <63세의 자화상> 등이 전시됩니다. 자화상 하면 ‘거장들 가운데 렘브란트가 곧바로 떠오를 ’ 주 2 만큼 자화상을 많이 그리셨죠? 평생에 걸쳐 80점 가까운 자화상을 그렸다면서요?
렘브란트(이하 R): 후대 사람들이 내 자화상이 80~100점 정도 된다는데, 정확한 건 나도 모르겠네요. 스물 두 살 때(1628년) 처음 자화상을 그렸고, 세상을 떠나는 해(1669년)에도 그렸답니다. 그러고 보니 40년 넘게 내 얼굴을 그린 셈이네요. 유화 50점, 판화 30점, 드로잉이 7점이 전한다 고 하니, 누군가는 내 자화상 시리즈를 ‘비주얼 다이어리’라고 부르더군요. 내 서거 350주년인 1999년에 상영된 <렘브란트>라는 영화에서 내 자화상들을 오버랩시켜 서서히 늙어가는 모습으로 재현했다는데, 그걸 못 본 게 아쉽네요.
최: 당시 화가들은 그림 좀 그린다 하면 이탈리아 유학을 다녀오는 게 유행이었어요. 그런 상황에서도 ‘국내파’를 고집한 이유가 있나요?
R: 내가 활동하던 네덜란드뿐 아니라, 전 유럽에 이탈리아 화풍, 특히 카라바지오를 숭배하는 분위기가 휩쓸고 있었어요. 내게도 왜 이탈리아에 가지 않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나는 ‘할 일이 너무 많아 바빴고, 유명한 이탈리아 작품은 네덜란드에서도 볼 수 있으니까 주 3 굳이 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어요.
최: ‘그림자는 르네상스의 발명품’이라고 할 만큼, 중세의 그림에는 그림자가 거의 등장하지 않아서 화면이 평면적이고 밋밋하게 보이는 게 단점이었어요. 당신은 그림을 더욱 입체적이고 깊어 보이게 하는 것이 빛이 아니라, 어둠과의 대비란 걸 알고 있었죠. 그 점에서 어두운 배경에 드라마틱하게 빛을 사용하는 ‘대담한 명암법 ’의 대가인 카라바지오(1571~1610)에게 영향을 받았나요?
R: 물론 나도 카라바지오의 영향을 받았어요. 고향 레이덴을 떠나 암스테르담으로 옮긴 1630년대부터 카라바지오가 개척한 빛과 어둠의 대비법을 적용하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나는 새로운 기법을 시도했어요. 카라바지오가 빛과 어둠을 화폭 위에서 대각선으로 대비시키는 명암법을 사용한 데 비해, 나는 얼굴 묘사에 빛과 그림자의 패턴을 묘사하는 새 방식을 개발 주 4 했어요. 화폭의 거의 절반을 어둡게 처리하고, 얼굴을 부각하면서 손이나 세부 표현을 생략하곤 했어요. 특히 눈가의 그림자 처리는 나만의 독창적인 기법입니다. 사람들은 내 초상화의 인물들에서 묘하게 눈을 뗄 수 없다고 하더군요. 복잡미묘한 내면을 표현하기에 눈은 정말 중요한 요소입니다.
최: 당시 네덜란드는 초상화 전성기였죠?
R: 예, 그랬어요. 예전에 초상화는 왕과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는데, 부를 축적한 상류층에서 저택의 실내를 장식하기 위해 초상화를 소장하려는 붐 주 5이 일었어요. 의뢰인들의 주문은 몹시 까다로웠습니다. 모피와 보석으로 치장해 부유함을 드러내되 품위 있고 절제하는 자태로 보이게 해달라고 주문했어요. <작은 개를 든 숙녀의 초상화>나 <공작 깃털 부채를 쥔 여인> 같은 초상화를 보면 압니다.
한번은 모피 판매상의 초상화를 그려줬는데, 이 남자가 두른 모피 목도리의 털 한 올 한 올 살아 있는 것 같다주 6 고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초상화의 인물들은 호들갑스럽거나, 도를 지나치는 법은 없었어요. 그들 자신보다 속마음을 더 꿰뚫어보고 있었다고 할까요. 덕분에 20대에 이미 나는 이미 최상류층만 상대하는 유명 화가가 되었어요. 큰 작업실을 운영하며 제자들도 많이 길렀습니다. 몰락하던 시기에도 나는 내 제자들에게 아낌 없이 내 기법을 전수해 주었어요.
내가 살던 17세기 암스테르담의 항구는 유럽의 돈을 쓸어 모으느라 북적거리고, 덕분에 내 그림 값은 천정부지로 솟았습니다. 나는 암스테르담, 아니 유럽 최고의 예술가였습니다. 젊은 시절 명성이 널리 퍼져서 지속적인 거래로 이어졌죠. <갑옷을 입은 남자>를 주문한 안토니오 루포는 시칠리아의 귀족으로 오랫동안 손 큰 고객이었어요. 언젠가는 그림이 마음에 안 든다며 되돌려 보낸 적도 있지만, 대체로 후하게 값을 매겨 주었습니다.
최: 하지만 전성기를 지나면서 초상화 인기도 시들해졌어요. 당신이 30대 중반인 1639년에 저명 인사가 초상화 인수를 거부하는 사건이 있었죠? 암스테르담 시장이자, 부호 가문의 안드리스 드 그라에프(1611~1678)가 초상화가 마음에 안 든다며 대금을 안 줬다면서요. 그때부터 사람들은 당신이 ‘한 물 갔다’고 수군거렸고요.
R: 음, 그때 얘기를 꺼내려니 속이 좀 쓰리군요. 당대 최고의 화가인 내 작품을 폄하하다니, 그런 작자에게 나도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어요. 집이 화근이었어요. 그 해(1639년)에 암스테르담 수로 옆에 있는4층짜리 대저택을 샀는데, 집값 대금을 4분의 1만 치르고 나머지는 그림을 팔아 잔금을 갚을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일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어요. 그 안드리스 시장에게 초상화 대금을 못 받은 건 둘째치고, 내 그림이 별볼일 없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겁니다. 빚은 늘어나고, 그림 주문도 끊기니 설상가상이었어요. 나와 내 아내 사스키아가 씀씀이를 줄일 사람들도 아니고. 나는 그때 온갖 진귀한 소품들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었어요. 동양의 앤티크나 동물 박제, 소품들을 닥치는 대로 사모았어요. 사람들은 내가 쓸데없는 곳에 돈을 펑펑 쓴다고 손가락질했는데, 뭘 모르고 하는 소립니다. 그게 다 내 그림의 소재였으니까요.
우리집 형편은 점점 곤궁해지고, 아이 셋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땅에 묻어야 했어요. 3년 후에는 아내 사스키아가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내를 보낸 그 해에 나는 작업실에 박혀서 대작 야경(The Night Watch)에 매달렸습니다. 다양한 인물 군상을 묘사하느라고 모델을 16명이나 썼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 내가 타고난 스토리텔러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예요. 인물 하나 하나가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그렸습니다. 미술사학자 사이먼 샤먀가 ‘인물이고 소품이고 마치 3D처럼 화면에서 튀어나올 것 같이 생생하다 주 7 고 감탄할 법하죠?
최: 아이 셋과 부인을 잃고, 명성도 예전 같지 않던 당신에게 유일한 위안은 헨드리케 스토펠스였죠? 스무살 연하인데도, 평생 당신 곁을 지켰어요. 전시 작품 중에 영국박물관에서 대여해온 ‘잠자는 젊은 여인(A young Woman sleeping’이 헨드리케를 스케치한 것이네요.
R: 휴… 내 아내가 되기를 평생 바랐던 그녀와 정식으로 재혼하지 못한 게 한이 됩니다. 전 부인 사스키아는 세상을 떠나면서 재혼을 하면 유산의 절반을 몰수한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빚더미에 올라앉은 내 형편에 그 유산을 포기할 수는 없었어요. 헨드리케 이전에도 아들 티투스의 보모였던 헤이처와 살다가 헤어졌어요. 그러다 하녀로 들어온 헨드리케한테 마음이 기울었는데, 나보다 스무살 연하였지만 나와 내 아들 티투스를 다정하게 보살펴 줬습니다.
헤이처는 집에서 나간 후에도 끈질기게 나를 괴롭혔어요. 보석도 주고 연금도 주기로 했는데도 이대로 물러나지 않겠다면서 혼인약속 불이행 소송을 제기했어요. 결국 소송에서 져서 헤어처에게 평생 동안 만만치 않은 생활비도 지원해야 했고요.
최: 내셔널 갤러리의 소장 작품이자, 이번에도 전시되는 ‘시냇물에 목욕하는 여인(A Woman Bathing in a Stream)’의 주인공이 헨드리케인가요? 마치 물의 요정처럼 신비하면서도 관능적인 이 그림이 당신의 자화상과 함께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네요. 미술사학자 사이먼 샤마도 여자의 피부가 ‘물 그 자체(water itself)’라고 극찬했어요.
R: 그림 속 모델이 헨드리케라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누구인지 밝히지는 않겠어요. 어쨌든 헨드리케와 꽤 닮은 건 사실입니다. 헨드리케가 제 딸 코르넬리아를 출산했을 때, 이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정식으로 혼인을 하지 않은 채 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에 구설수에 올랐어요. 교회는 헨드리케에게 아이 아버지를 밝히라며 네 번이나 소환장을 보냈고요. 그녀는 할 수 없이 종교회의 위원회에 출두해서 ‘렘브란트와 간음하여 몸을 더럽혔다’고 억지 증언을 주 8 해야 했어요. 이런 험한 일까지 겪었지만, 헨드리케는 변함 없이 나에게 잘해 주었습니다. 주위 사람들도 그녀가 ‘사랑스럽고 충실한 동반자 주 9 였다고 칭송했어요. 아쉽게도 그녀는 나보다 6년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게 너무 애통해서, 나는 사후의 그녀에게 꽃의 여신 플로라로 화려하게 변신시킨 초상화를 바쳤습니다.
© The National Gallery, London
최: 아들 티투스(1641~1668년)도 각별히 사랑하셨죠? 내셔널 갤러리에서 전시되는 ‘책상에 앉은 티투스(Titus at his Desk)’에도 십대 아들을 바라보는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네요.
R: 티투스는 사스키아와의 사이에 낳은 네 아이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이였어요. 힘들었던 시기에 이 아이의 영민한 눈을 바라보면서 큰 위안을 얻었습니다. 아들은 내 작품에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고, 내가 집도 잃고 파산한 이후에도 보호막이 되어 주었어요. 주 10 나는 아들이 어릴 적부터 화폭에 즐겨 담았어요. 베레모를 쓴 모습, 책을 읽는 앞 모습과 옆 모습도 그렸어요. 수도원 생활을 한 적이 없었지만, 수도사 옷을 입은 모습도 그려봤어요. 그 애는 제법 훌륭한 모델이자, 제 그림 실력을 알아준 사람이었답니다. 그렇게 내게 큰 위안을 준 아들이 스물 여섯 결혼하던 해에 페스트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크게 상심한 나는 이듬해(1669년)에 아들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 평생 동안 성화도 열심히 그렸어요.
R: 가족들은 모두 카톨릭교도였지만, 나만 유일하게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지지했어요. 독실한 신자는 아니었지만 성화를 꾸준히 그렸어요. 당시 네덜란드에는 칼빈파 개혁교회가 우세했지만, 다른 종교도 공존하는 사회였어요. 개혁교회는 중세 카톨릭에 비해 온건했고, 교회를 성화로 치장하는 것도 덜했어요. 성화의 분위기도 예전처럼 엄숙하고 딱딱하기보다 내 새로운 화풍도 소화할 만큼 달라지고 있었어요.
나는 역사화를 최고의 그림으로 생각했고, 성화도 풍부한 역사의 이야기를 담는 역사화였어요. 성서를 인용한 <요셉과 포피타의 아내>는 동판화와 유화로 작업했는데, 마치 이야기책의 한 페이지를 보는 것처럼 그려봤어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시몬을 묘사한 그림 <사도 시몬>을 보세요. 자신이 살해 당한 톱을 옆에 끼고 있는 상황을 보기만해도 힘이 빠질 걸요.
최: 빈센트 반 고흐가 한눈에 반했다는 ‘유대인 신부(Jewish Bride)’도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 빌려와서 전시하네요. 고흐는 1885년 이 작품을 보고 ‘빵 조각만 뜯으며 2주일 동안 그림 앞에 앉아 있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내 인생의 10년을 포기하겠다 주 11 고 친구에게 말할 정도였어요. 형 테오에게도 편지를 보냈죠. ‘이 얼마나 친밀하고, 얼마나 다정한 그림인가’라고요. 이 작품의 온화하면서도 신비한 분위기, 빛의 사용, 배경 처리 등이 후대 화가들에게 영향을 크게 끼쳤답니다.
R: 고흐가 내 작품의 진가를 알아봤군요. 나도, 고흐도 당대 사람들에게 이해 받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당시 유행하는 공식처럼 그저 예쁘고 사실적으로만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죠. 일명 ‘유대인 신부’로 알려진 이 작품도 ‘물감을 너무 두텁게 칠했다, 배경이 어둡다, 분위기가 묘하다’는 둥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꽤 흐르고 나서야 이 작품이 내 대표작으로 꼽힐 만큼 인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작품 속 남녀에 대해서도 해석이 분분하다면서요. 그림 속 한 쌍이 내 아들 부부인지, 성서 속 인물인지 궁금해 한다면서요.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의 융합을 가장 다정다감하게 표현’했다는 호평도 받고 있다니, 기분이 좋아요. 훌륭한 그림은 스스로 주장하기보다는 보는 사람이 많은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최: <요한 데이만 박사의 해부학 수업>을 그린 1656년 즈음은 당신이 모든 것을 잃고 파산한 때였어요. 뇌가 드러난 시체의 모습이 절망에 빠진 당신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네요.
R: 허허, 그렇게 보이나요? 서른 중반부터 진흙탕 길을 걸어왔는데, 그때 내 나이 쉰을 넘기고도 벗어나지 못했어요. 집을 살 때 진 빚을 갚으려고 여러 해 전부터 친구에게 돈을 빌리고, 내 작품들을 담보로 간신히 해결해 나갔지만,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어요. <해부학 수업>을 그린 해 (1656년) 여름에는 집에 보관했던 내 모든 작품들, 그림을 그리려고 모은 진귀한 소품까지 전부(363점)를 압수 당했어요. 가을엔 말도 안 되는 헐값에 경매로 팔려 버렸습니다. 이듬해에는 그토록 지키려고 했던 집도 경매로 넘어 갔어요. 새로 그리는 그림과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차지하려는 채권자들을 피하려고 아들 티투스에게 재산권을 양도하고, 나는 법적으로 무일푼이 됐습니다.
최: 파산하기 1년 전인 1655년에 그린 <도살된 황소>는 당시 화려한 정물화나 아름다운 풍경화를 선호하던 암스테르담 부자들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게다가 1661년에는 모처럼 대작을 주문 받아서 암스테르담 시청 신청사 벽에 걸 <율리시스 시빌리스의 음모> 를 작업했는데, 이 작품은 걸리자마자 ‘너무 어둡고 그로테스크하다’며 돌려받는 수모를 당했어요.
R: 내 생애 최고의 역작을 못 알아본 거죠. ‘너무 어둡다, 배경이 텅 비어 있다, 칠하다 만 것 같다, 나라를 구한 영웅 시빌리스를 애꾸눈에 야만스럽게 그려놨다’는 둥 말들이 많았어요. 시빌리스는 부상을 입어 한쪽 눈을 잃은 게 역사적 사실입니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역사화가 뭔지도 모르고, 역사를 터무니 없이 미화하려는 자들이 뭘 알겠습니까?
내가 살던 17세기 최고의 그림 장르는 역사화였어요. 나도 20대부터 거실용 정물화나 풍경화보다는 역사화에 끌렸습니다. 초상화로 유명해졌지만, 내 관심은 역사와 성서 속의 생생한 이야기였어요. 암스테르담 시청 벽에 잠시 걸렸던 내 그림은 내 평생 가장 크게 그린, 가로 사이즈 5미터가 넘는 대작이었어요. “늙은 사자의 포효처럼 페인팅했다”는 사이먼 샤마의 평이 아주 맘에 듭니다. 350년이 넘은 후의 평가지만요. 당시 의뢰인에게 어처구니 없는 혹평을 듣고 그림 값은 한 푼도 지불되지 않은 채 돌아온 작품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올라서 칼로 찢어 버렸어요.주 12 그나마 남아서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에 걸려 있는 건 원래 작품의 4~5분의 1 크기 밖에 안 됩니다.
이 사건이 있고 나서 나는 말했습니다. “이들이 야만스러웠던 조상이다. 정직하게 직시하고 받아들여라… 지금 네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게 아무 것도 아니다. 대리석으로 둘러싼 (암스테르담) 시청은 내일은 가고 없을 것이다. 암스테르담은 다시 바다로 침수될 수 있다. 주 13”
사람들이 끔찍하다고 기피했던 <도살된 황소>나 <황소의 사체>만 해도 수백 년이 지나서야 진가를 인정받은 것 같아요. 내 후배 화가 피카소, 생 수틴, 베이컨 등이 패러디를 했다면서요. 패러디야말로 내 작품에 바치는 헌사가 아니겠습니까?
다행히 몇몇 단골들은 나를 외면하지 않았어요. 상인들이 길드에 걸어두려고 주문한 <의류 제조업자 길드 평의원들의 초상화>도 그 즈음 완성한 작품입니다. 친분이 있는 의뢰인들의 초상화도 꾸준히 그렸어요.
최: 18세기 말부터 인상파를 비롯해 자화상을 그리는 화가들이 늘어났어요. 선생님이 활동한 17세기만 해도 자화상(self-portrait)이 드물었다면서요?
R: 자화상이라니 처음 듣는 말이네요. 내가 살던 시대에는 그냥 ‘화가의 초상’이라고 불렀어요. 화가가 자기 초상화, 그러니까 자화상을 나처럼 많이 그린 건 아주 드문 일이었어요.
최: 하긴 자화상이란 말도 19세기에 와서 생겼대요. 안타깝게도 지금도 자화상은 ‘미술사 전반에 걸쳐 늘 초상화의 하위 단위로 취급 주 14 되고 있다고 하네요. 당신의 자화상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봤다면 그런 터무니 없는 평가를 할 리가 없을 텐데요. 미술사가들 중에는 당신이 초상화 연습용으로 자화상을 그렸다고 짐작하는 사람도 있어요. 당신은 부자들 초상화로 부와 명성을 쌓았으니까요. 또, 당신이 평생 왜 그렇게 많은 자화상을 그렸는지 어떤 자료도 남기지 않았고, 언급했다는 기록도 없으니까주 15 자화상이 별 의미가 없었음을 증명하는 거라는 둥, 온갖 억측이 난무하는 거죠.
R: 화가가 그림을 남겼으면 됐지, 꼭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요? 내가 힌트를 준 적은 있어요. 후원자에게 편지를 쓰면서 내 작품의 목적은 ‘가장 위대하고 또 가장 자연스러운 움직임주 16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했어요. 또 이런 말도 남겼어요. ‘예술에 대해 내가 뭘 아냐고 하면, 나에게 그건 뒤죽박죽 같다’고.
제 말귀를 잘 알아듣는 사람은 드문데, 그래도 후대의 몇 사람은 내 본뜻을 잘 해석해주는 사람들이 있던데요. 로라 커밍이라고 미술평론가인데, 여성의 눈으로 엑스레이처럼 섬세하게 내 자화상을 봤어요. (나도 섬뜩할 정도요.) 그녀가 말하길 ‘렘브란트가 극장의 어둠 속에 등장할 때 그것은 관람객들과의 교감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의 등장은 완전히 배우 자신의 독백을 위한 것이었다. 젊었거나 늙었거나, 렘브란트는 언제나 연기를 하고 있었다’고요.
또, 한 사람 있어요. <파워 오브 아트>를 쓰고, 같은 제목의BBC 시리즈에 내 이야기도 소개한 사이먼 샤먀(Simon Schama)라는 미술사학자 말로는 내가 ‘세련되거나 아름다운 것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런 건 지루해했다’고 평했습니다. 사실, 젊은 시절 잘 나갈 때는 부자들 비위를 맞추려고 실물보다 잘 생기게 그려준 적도 많았어요. 하지만, 해가 갈수록 나는 내 생각대로 밀고 나갔어요. 속물들이 내 뜻을 어떻게 이해했겠습니까?
최: 이번 내셔널 갤러리 전시에는 말년의 자화상 4점이 걸리네요. 자화상의 이정표를 세웠을 만큼, 중요한 작품들입니다. 1661년 에 완성한 ‘베드로 사도로 분장한 자화상(Self Portrait as the Apostle Paul)’. 죽음을 목전에 둔 1669년에 그렸던 ‘터번을 두른 자화상(Self Portrait Wearing a Turban)’은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이네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역점(63세의 자화상, 두 개의 원이 있는 자화상)이 한 자리에서 만나네요.
R: 말년에 자화상을 많이 그렸는데, 이번에 4점만 소개된다니 조금 아쉽기는 하군요. 영국, 네덜란드, 미국, 프랑스, 스위스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니 다 모으긴 어렵겠지요. 하지만, 이번에 전시되는 4점은 내 평생의 역작이라고 할 만합니다.
최: 런던 켄우드하우스에서 대여해온 ‘두 개의 원이 있는 자화상’은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해요.
R: 그 자화상을 보러 켄우드하우스를 찾아갈 만큼 명성이 자자하다면서요. 그 전시실에는 나와 동시대에 활약했지만, 당시에 존재감은 미미했던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기타 치는 소녀’가 내 자화상과 사선으로 바라보고 있어요. 관람객들은 이 두 그림에 가장 많이 모여들고요.
내 자화상의 배경에 그린 두 개의 커다란 원이 무슨 의미일지 궁금해서 관람객들이 내 눈을 오래도록 응시하지만, 꾹 다문 내 입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계속 묻는다면, 내가 전하고 싶은 말을 몽테뉴의 말로 대신하겠어요. ‘모든 모순들이 내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 자신을 진심으로 연구하는 자는 자기 안에서 혹은 자기 심판 안에서 이 불화를 발견하고 만다. 나는 혼동과 엇갈림 없이 한마디로 간단하게, 확실하게 나에 대해 말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주 17
최: 어느 아트 비평가는 가디언지에서 ‘렘브란트의 후기 자화상을 볼 때, 우리는 그가 우리가 뭐라고 생각하든 개의치 않는 것처럼 느낀다. 그게 바로 우리가 (렘브란트를) 의식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어요. ‘두 개의 원이 있는 자화상’을 시작했을 때보다 더 나중에 그린 ‘63세의 자화상’은 행색이 초라합니다. 이번에는 손에 팔레트도 붓도 쥐지 않고, 그저 두 손을 잡고 있을 뿐입니다.
R: 엑스선 촬영으로 알았겠지만, 처음엔 나도 내 손에 팔레트와 붓을 쥐어 주었다가, 지워버렸습니다. 화가에게 팔레트와 붓이 의미하는 것, 그리고 이제 손에 쥐고 있지 않다는 것이 뭘 의미하겠습니까.
참으로 묘하게도 내셔널 갤러리가 내 이름을 붙여준 전시실에 가면, 이 마지막 자화상(63세의 자화상)이 내가 가장 찬란했던 서른 네 살의 자화상을 마주보고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내가 한창 시절의 나를 마주하고 있다고 할까. 아니, 전혀 다른 내가 나를 낯설게 곁눈질하고 있다고 할까. 누가 전시실 큐레이션을 했는지 모르지만, 참 짓궂게 배치했어요.
최: 인터뷰를 할수록 수수께끼에 더 빠지는 것 같아요. 당신은 자화상 속에서 자신을 왕처럼 화려하게, 우스꽝스럽게, 때로는 탕아나 심술쟁이처럼도 묘사했는데요. 로라 커밍은 <화가의 얼굴, 자화상>에서 ‘램브란트는 자화상이 어때야 한다는 이정표를 세웠다. 그의 자화상은 외적인 관찰뿐 아니라 내적인 통찰을 할 줄 아는 그만의 재능, 내향적 상상의 감각’이 탁월하다고 예찬했어요. 후대 사람들도 당신에게 자화상의 전형을 배우고, 패러디도 합니다. 세계 저명 인사들을 우스꽝스럽게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 로드니 파이크(Rodney Pike)가 최근 당신의 서른 네 살의 자화상을 패러디했어요. 영국의 코미디언 미스터 빈이 놀란 토끼 눈으로 쳐다보는 패러디인데요. 마음에 드나요?
R: 하하. 대단한 패러디네요. 아주 마음에 듭니다.
'새소식 및 행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온라인 리플릿 (0) | 2016.08.01 |
---|---|
기회/행운과 관련된 상황별 필수 숙어- 11월 5주 (0) | 2013.12.06 |
주한영국문화원 겨울집중코스로 단기간에 영어실력도 향상하고 무료수강 혜택도 받으세요 (0) | 2013.12.03 |
기회/행운과 관련된 상황별 필수 숙어- 11월 5주 =test (0) | 2013.12.02 |